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며 봄의 절정을 향하는 가운데,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는 난데없이 눈과 우박이 떨어졌습니다. 초여름을 방불케 하던 기온이 높았던 날, 그 다음 날에는 초겨울의 추위가 찾아왔습니다. 이번 봄은 유난히 변화무쌍한 날씨가 아니었을까 하는데요. 봄을 시샘하는 날씨의 변덕스러움이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지만, 그와 상관없이 우리의 시계 라이프는 계속되어야 하겠죠? 시계를 차고 천천히 흐르는 바늘을 바라보면, 변덕스럽고 정신없는 봄날의 작은 위안으로 삼을 수 있을 터이니까요.
그린 베젤 서브마리너의 세 세대© Chronext
봄을 알리는 변화라면 단연 나무와 풀이 푸릇푸릇하게 변화하는 모습입니다. 봄을 상징하는 색상의 하나인 그린은 계절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색조로 변합니다. 새싹이 피어나는 신록의 연두색에서 점점 짙어지며 여름으로 향해가는 그린처럼 말이죠. 브랜드 컬러로 그린을 사용하는 롤렉스는 그래서 봄과 찰떡궁합입니다. 전부 그린이라 불리지만 다양한 그린 스펙트럼을 선보이며 계절의 변화를 담습니다.
16610LV ‘커밋’: ‘플랫 40’ 라임 그린 베젤© 41 Watch
롤렉스에서 그린의 역사를 이끈 주역은 단연 서브마리너입니다. 서브마리너 탄생 50주년에 즈음해 등장한 Ref. 16610LV는 블랙 일색이었던 스테인리스 소재 서브마리너에 생동감을 불어넣었습니다. 서브마리너 Ref. 16610LV는 지금과 달리 베젤 인서트의 소재가 알루미늄이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시계는 생산 시기(시리얼 넘버)에 따라 베젤 인서트의 톤이 각기 달랐습니다. 인기가 높은 색상은 살짝 노란 빛을 띠며 변색을 머금은 라임 베젤 – 이 색상 때문에 ‘커밋(Kermit)’이라는 별명이 붙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세서미 스트리트에 나오는 유명한 연두색 개구리 말이죠. 짙은 레이싱 그린 베젤도 금속성 소재의 특성을 드러내며 인기가 있지만, 라임 베젤만이 주는 독특한 매력은 많은 이들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서양권에서는 이 색을 이탈리아의 ‘베르톨리(Bertolli)’ 올리브유에 빗대어 표현하기도 합니다.
Submariner Date 16610LV
40mm, 블랙, 오이스터
© Time and Tide, Rolex
서브마리너 Ref. 16610LV의 뒤를 이어받아 Ref. 116610LV, 일명 ‘헐크’의 등장은 또 다른 전환점이 됩니다. Ref. 넘버가 여섯 자리로 바뀌면서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는 베젤 인서트의 소재가 세라믹으로 바뀐 점입니다. 전작의 뒤를 이어 그린 베젤을 택한 Ref. 116610LV는 한 발 더 나아가 다이얼까지 그린으로 물들였습니다. 강렬한 그린 색상과 선레이 패턴의 조합을 이룬 헐크는 이름처럼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했습니다. 지나치게 파격적이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낯설어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헐크는 발매 초기에 큰 인기를 얻지 못했죠. 모노톤의 서브마리너와 다른 개성을 가진 헐크를 과감하게 착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지금은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Submariner Date 116610LV
40mm, 그린, 오이스터
© A Blog to Watch
헐크 이후에는 서브마리너 Ref. 126610LV가 계보를 잇습니다. 이 레퍼런스는 그린 서브마리너의 원조인 Ref. 16610LV의 검정 다이얼과 그린 베젤의 구성을 부활시켰습니다. 검정색 다이얼을 둘러싼 짙은 세라믹 그린의 베젤이 스타벅스의 로고를 연상시킨다고 하여 ‘스타벅스’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이 시계를 착용하면 이탈리안 로스트의 진한 커피가 생각나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2023년 워치스 앤 원더스를 기점으로, ‘스타벅스’의 베젤 컬러가 이전보다 더 옅은 톤으로 변경되었습니다. 레퍼런스에는 변화가 없으니, 구매를 결심하신 분들께서는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Submariner Date 126610LV
41mm, 블랙, 오이스터
© Monochrome Watches © Watch Collecting Lifestyle
롤렉스의 그린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다른 컬렉션에서도 그린은 중요한 색상으로 자리잡습니다. 스카이-드웰러 역시 봄의 색상인 그린과 멋진 조화를 이룹니다. 옐로우 골드 케이스는 케이스 소재의 화려함에 밀리지 않는 쨍한 선레이 그린 다이얼과 어우러집니다. 브라이트 그린으로 명명한 이 색상은 진한 깊이감과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변화무쌍함이 특징입 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변덕스러운 봄날씨와 마주한 초록의 자연 같은 느낌이죠. 또 다른 그린 옵션은 민트 그린입니다. 스테인리스 케이스와 조합하는 이것은 브라이트 그린처럼 쨍하거나 깊이감이 있지는 않습니다. 대신 스테인리스 소재와 어울리는 색상이며 차분함이 있죠. 봄에 색을 더하고 더해 짙어진 초록의 나뭇잎이 여름을 막 앞둔 색상이라고 할까요.
Sky-Dweller 336934
42mm, 민트 그린, 쥬빌리
© Omega
© IWC
물론 그린은 롤렉스만의 색상은 아닙니다. IWC의 파일럿 워치 크로노그래프(Ref. IW388103/04)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전통의 파일럿 크로노그래프 디자인은 강렬한 선레이 그린 다이얼과 만나 색다른 개성을 발휘합니다. 검정색 군용 파일럿 워치의 엄격함을 벗어나 강한 빛을 받으면 강렬함을 발하는 다이얼은 스카이-드웰러의 브라이트 그린과도 비슷합니다. 차분한 그린이라면 올리브 그린에 가까운 오메가 씨마스터 다이버 300M의 그린도 좋은 선택지입니다. 다이얼과 베젤을 같은 색상으로 맞춘 이 시계는 특유의 물결 무늬 같은 전통적인 디테일을 그린으로 해석했습니다. 군용시계를 연상케 하는 진중한 색감은 가히 심록색으로 부를 만합니다.
Seamaster Diver 300M 210.30.42.20.10.001
42mm, 그린
Pilot's Watch Chronograph 41 IW388103
41mm, 그린
Pilot's Watch Chronograph 41 IW388104
41mm, 그린
© Cartier
봄이 되면 변화하는 것은 자연의 색상만이 아니죠. 따뜻한 기온은 옷차림을 가볍게 만듭니다. 두꺼운 외투 아래에서 겨울잠 자던 시계가 깨어날 때가 온 것입니다. 튼튼하고 믿음직한 다이버 워치도 좋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경쾌한 옷차림처럼 가볍고 착용감 좋은 시계를 즐길 수 있는 길지 않은 시기이니까요. 영원한 고전의 하나로 꼽히는 산토스는 가죽 스트랩과 브레이슬릿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시계입니다. 기온이 갑자기 상승해 초여름 같은 날씨에는 브레이슬릿, 반대로 갑자기 기온이 하강하면 가죽 스트랩으로 봄의 변덕스러움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작고 가벼워 봄 옷차림에도 제격입니다.
1904년, 브라질 출신의 탐험가이자 비행사였던 알베르토 산토스 듀몽이 열기구에 탑승하기 위해 손목에 착용할 수 있는 시계를 친구인 루이 까르띠에에게 부탁하면서 탄생했습니다.
어쩌면 초기 파일럿 워치라고 부를 수 있는 산토스는 무엇보다도 케이스에서 자연스럽게 스트랩을 연결할 수 있도록 오늘날 널리 사용되는 케이스 디자인을 확립한 시계이기도 합니다. 바로 러그(Lug)를 케이스 디자인에 녹여 손목시계의 시작점을 찍은 시계죠.
그래서 산토스는 언제나 본연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시대에 맞춰 변화해왔습니다. 지금의 산토스는 스포츠 워치의 시대에 어울리게 좀 더 남성적이고 단단하게 진화했습니다. 다이버 워치만큼 묵직하고 튼튼하지는 않지만, 솔리드한 브레이슬릿은 과거의 산토스와 비교하면 상당한 남성성을 발산합니다. 다이얼 색상이 다양해진 점도 변화의 일면일 것입니다. 클래식한 실버, 시크하면서 개성적인 브라운(2025년 단종), 시원한 블루도 빼놓으면 안 되죠.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그린 다이얼의 산토스는 최고의 봄 시계입니다. 봄의 색상을 담은 시계이니까요.
Santos MM WSSA0029
41.9mm x 35.1mm, 실버
Santos LM WSSA0030
47.5mm x 39.8mm, 블루
Santos MM WSSA0061
41.9mm x 35.1mm, 그린
© Cartier
댄디한 남성을 위한 또 다른 옵션은 발롱 블루입니다. 까르띠에의 컨텀퍼러리를 보여주는 컬렉션이죠. 조약돌처럼 동글동글한 케이스와 블루 사파이어 카보숑으로 장식한 크라운을 케이스 속으로 품은 디테일이 특징입니다. 브레이슬릿 버전도 산토스처럼 무겁지 않아 착용감이 탁월합니다. 가벼운 봄의 옷차림과 발군의 궁합을 보여줍니다. 사각형의 산토스가 누구에게나 다 어울릴 수는 없죠. 사람마다 생김새가 다른 것처럼 손목의 굵기, 모양이 제 각각 다르니까요. 좀 더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팔뚝의 체모 유무, 손등의 핏줄이 드러나는지 아닌 지도 시계와 어울림을 결정합니다. 손과 손목이 둥근 편이라면 산토스 보다 발롱 블루가 더 어울릴 겁니다. 100%라고 장담은 할 수 없지만요.
Ballon Bleu W69012Z4
42mm, 실버
Ballon Bleu WSBB0049
42mm, 실버
Ballon Bleu WSBB0040
40mm, 실버
Ballon Bleu WSBB0048
36mm, 실버
Felix
Writer
시계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