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아포테케(apothḗkē)’는 저장소를 의미하는 라틴어 ‘아토테카(apothēca)’로 변형되었고, 옛 프로방스어 ‘보티카(botica)’를 거쳐 프랑스어 ‘부티크(boutique)’로 정착했죠. 13세기에는 길드제도 아래에서 수공업자의 전문점을 칭하는 단어였습니다. 이후 부티크의 뜻은 점차 범위가 좁아져 고급전문점으로 바뀌었고, 2000년대를 지나며 사교의 장이라는 뉘앙스까지 더해집니다.
© Shinsegae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 중심부의 요지에는 백화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덕분에(?) 백화점에서 큰 세일이라도 하는 시기에는 근처의 교통이 정체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리곤 합니다. 백화점은 말 그대로 백 가지 물건을 취급하는 곳인데요. 요즘 기준으로 본다면 모든 물건을 취급한다는 의미이겠죠. 그리고 백화점의 매출을 견인하는 주요 품목의 하나에는 시계가 빠질 수 없습니다. 하나의 장소에서 물건을 구입할 수 있는 본래의 역할에 문화적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으로 발전하고 있어 사람이 몰리기 마련입니다. 백화점에서 제공하는 멤버십 혜택과 번잡한 대도시 중심부에서 비교적 용이하게 주차가 가능하다는 점은 더욱 백화점으로 향하게 하죠. 시계를 산다면 가장 먼저 백화점을 떠올리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것입니다.
샤넬, 루이비통, 디올, 구찌, 버버리 같은 패션 브랜드와 까르띠에, 반 클리프 아펠 등의 워치 앤 주얼리 브랜드가 집중해 있는 일명 청담동 명품거리에 최근 시계 단독 부티크가 속속 들어서고 있습니다. 이들이 들어오기 전부터 명품거리를 형성하고 있는 이곳에서는 외관으로 시선을 사로잡는 건축물이 즐비합니다.
© Louis Vuitton, Gucci, Burberry
루이비통 부티크는 유명 건축가 프랭크 게리(Frank Gehry)의 설계로, 전통 동래학춤과 수원화성에서 착안한 넘실거리는 듯한 유리 파사드가 이목을 끕니다. 구찌의 부티크는 ‘도심 속 수직 공원’이라는 컨셉트 아래 다양한 식물이 노출된 건물 외관으로 고유한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버버리는 특유의 체크 패턴을 레인 스크린으로 구현해 멀리서 보면 버버리 체크의 형상이 나타도록 했습니다. 이들 명품 회사들은 단순히 상품을 파는 공간을 넘어 건축적 랜드마크로 자리잡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또한 각 부티크에서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고 있는데요. 2000년대에 부티크에 가미된 사교의 장의 역할과 때로는 고객 경험의 실험장으로도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렇듯 건축이나 교류의 관점이 아닌 운영 효율성 측면에서 본다면 단독 매장의 부티크가 백화점보다 더 높은 수익을 거둘 수도 있습니다. 서울에서 가장 땅값과 임대료가 비싼 청담동이고 독특한 건물을 올리거나 리뉴얼한 비용까지 고려한다면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만, 이미지 구축을 위한 일종의 투자 비용으로 환산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매출 대비 이익률을 따진다면 백화점 수수료를 지불하지 않는 부분을 이익으로 바꿀 수 있을 터입니다. 일반 매장이 아닌 부티크 전용 상품을 내놓아 독점적인 판매를 취할 수도 있습니다.
각 명품 브랜드가 전달하고자 하는 이미지와 메시지의 통일성 측면에서도, 부티크의 접근 방식이 보다 유리합니다. 딜러를 통해 상품을 판매한다면 이 과정에서 브랜드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달라지거나 왜곡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고객 관리 측면에서도 부티크가 유리한 측면이 많습니다. 예약제와 여유롭고 차단된 공간을 이용해 프라이버시를 보호할 수 있죠. 직접 참여하는 체험 행사, 전시회에 고객을 초대해 색다른 문화적 체험을 가능케 해 의미 있는 시간을 소비할 수 있도록 제안할 수도 있습니다.
시계 브랜드들은 이미 사람들이 선호하는 백화점에 매장이 있으면서도 왜 단독의 부티크를 만들고 있을까요? 해답은 위에서 밝힌 명품 회사의 부티크 전략과 다르지 않습니다. 건축적 랜드마크와 문화적 공간, 고객체험, 그리고 부티크 익스클루시브를 통해 차별화된 경험을 제공하려는 것입니다.
AP House Seoul © Audemars Piguet
AP 하우스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또 하나의 집(A Home Away From Home)을 콘셉트로 한 부티크입니다. 각국의 AP 하우스는 지역적 특색을 살려 획일적인 감각을 지양합니다. 뉴욕 AP 하우스는 1920년대의 아르데코 스타일에서 영감을 받았고, 홍콩 AP 하우스는 중국 전통 문양을 현대적으로 해석했습니다. 도쿄 AP 하우스는 와비사비(Wabi-Sabi) 미학을 살려 소박함과 단순함, 자연스러운 노후화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서울 AP 하우스는 VIP 라운지와 CS를 갖춘 6층 건물로, 브론즈 색상의 외관은 비 내리는 발레 드 주의(Vallée de Joux) 풍경을, 내관은 오행(五行)을 표현했습니다.
Vacheron Constantin 1755 Suite Dubai© Vacheron Constantin
올 상반기에 문을 열 예정인 바쉐론 콘스탄틴의 ‘메종 1755’는 창립년도인 1755년에서 따왔습니다. 공개된 외관은 뉴욕의 플래그십 스토어와 유사합니다. 바쉐론 콘스탄틴의 심벌인 말테 크로스를 기하학적인 조형과 금빛 색상으로 구현했습니다. 6층 규모인 메종 1755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바쉐론 콘스탄틴 부티크로 기록될 전망입니다. 올해로 270년을 맞이한 바쉐론 콘스탄틴의 역사에 메종 1755가 한 줄을 더하리라 생각됩니다.
로카(Rocca) 1794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워치 앤 주얼리 리테일러입니다. 1794년 시계 제작으로 시작했으나 현재는 리테일을 전문적으로 하고 있으며, 이탈리아와 스위스 등에 20여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주얼리 그룹 다미아니(Damiani)가 로카 1794를 인수(2020년)했으며, 이번 청담동에 들어설 부티크는 로카 1794가 리테일러로 참여해 운영하게 됩니다. 7층 규모의 건물에는 여느 시계 부티크와 마찬가지로 VIP 전용 공간을 비롯한 다양한 고객 시설이 마련될 예정입니다.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규모의 부티크이기 때문에 오픈 이전부터 ‘오픈런’을 기대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 Jacob & Co.
본문에서 언급한 까르띠에와 반 클리프 아펠, 그리고 리차드 밀은 이미 청담동 명품거리에 자리하고 있으며, 주얼리가 강세인 가운데 미국적 감성을 담은 시계를 함께 다루는 티파니앤코도 이곳에 문을 열 예정입니다. 명품거리에서 조금 떨어진 도산공원 근처에는 제이콥 앤 코 부티크가 새롭게 들어섰습니다. 이곳에서는 천체의 움직임을 보석으로 묘사한 아스트로미아(Astromia)를 비롯해, 아방가르드한 초 하이엔드 워치와 대담한 디자인의 주얼리를 선보입니다. 청담동은 이제 단순한 명품 쇼핑 거리를 넘어, 각 브랜드의 정체성과 예술성이 살아 숨 쉬는 문화적 공간으로 재탄생하고 있습니다
Felix
Writer
시계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