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적과 김진표가 함께 했던 그룹 패닉의 노래 ‘왼손잡이’는 왼손잡이에 대한 사회적 시선, 나아가 남들과 다른 사람에 대한 불편한 시선을 이야기합니다. 현실에서 왼손잡이는 여러모로 불편합니다.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오른손잡이를 기준으로 많은 것들이 만들어졌기 때문이죠. 당장 주위를 둘러보면 손과 뗄 수 없는 마우스, 지하철의 개찰구, 각종 악기 등등. 시계도 이들 물건처럼 오른손잡이가 착용하는 점을 가정하고 만듭니다.
ⓒ watchbandit
보통 시계를 착용하는 손은 왼손입니다. 오른손이 바쁘게 일하기 때문에 덜 바쁜 왼손에 시계를 차는데요. 왼손잡이에게도 공평한(?) 시선을 가졌던 몇몇 시계회사는 왼손잡이를 위한 시계를 만들었습니다. 이번 편에서는 소수의 왼손잡이를 위한 시계를 살펴보겠습니다.
일상에서는 온통 불편하고 불리한 것 투성이지만 왼손잡이가 우대받는 분야가 있습니다. 스포츠, 그 중에서 특히 야구는 왼손잡이가 크게 우대 받습니다. ‘강속구를 던지는 왼손 투수는 지옥에 가서라도 데려온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빠른 공을 던질 수 있는 좌완 투수의 높은 가치를 이르는 말입니다. 또 좌완 투수가 강속구를 던질 때 타자들이 상대하기 매우 어렵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나타냅니다. 왼손 투수는 오른손 타자에게 공의 궤적이 다르게 보이기 때문에, 타자가 공을 예측하고 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듯 좌완 투수를 싸우스포라고 하고 권투에서도 동일하게 통용되는 용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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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티는 싸우스포처럼 특정 스포츠에 초점을 두지 않고 왼손잡이를 지칭합니다. 이점이나 반대로 편견을 담지 않은 비교적 중립적인 단어입니다. 시계에서 왼손잡이용을 레프티라고 하기도 하고 레프트 핸디드(Left handed)라고도 하며, 후자가 더 중립적이며 정중한 표현합니다. 같은 의미로 통용되는 데스트로는 이탈리아어입니다. 파네라이가 왼손잡이용 시계를 내놓으며 익숙해진 단어죠. 뜻은 왼쪽이나 왼손이 아니라 오른손을 뜻하는데요. 시계를 착용하는 손을 기준으로 말하는 것 같습니다. 왼손잡이라면 보통 시계를 오른손에 차니까요.
데스트로라는 단어를 익숙하게 만든 파네라이는 왼손잡이용 시계 만들기에 적극적입니다. 전체 제품 비중을 고려했을 때 상당히 많은 수의 시계를 데스트로로 만들었습니다. 시, 분침 만 가지고서 시간을 표시하는 베이스(Base) 모델이 적지 않은 파네라이로서는 사실 데스트로를 만드는 공정이 그리 어렵지는 않습니다.
PAM01655 - Luminor Destro Otto Giorni ⓒ panerai
다이얼에 변화가 없어서 오른손잡이용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고, 다이얼을 그대로 둔 관점에서 케이스와 무브먼트를 180도 돌리기만 하면 됩니다. 다이얼을 기준으로 삼았지만 반대로 보자면 다이얼만 180도 돌려 넣으면 되기 때문에 딱히 어려운 작업은 아닙니다. 물론 초침이 달렸거나 날짜,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 같은 기능이 더해지면 다이얼을 별도 제작해야 하는 수고가 더해지지만 말이죠. 요즘은 좀 뜸해졌지만 이미 발매한 시계들 중에서는 왼손잡이용으로 풍부한 선택지가 있습니다.
Luminor 1950 Marina Militare Steel Black Dial Limited Edition 47mm ⓒ wristcheck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1950년대 초반부터 나온 마리나 밀리타레 루미노르 (Marina Millitaire Luminor) Ref. 6152-1 같은 데스트로가 파네라이 왼손잡이용 시계의 시초가 됩니다. 루미노르의 크라운 가드는 파네라이 디자인의 정체성이지만 제법 돌출된 탓에 손목에 타이트하게 착용하면 손등의 움직임을 제한하거나 피부를 누르기도 합니다. 그 때문에 오른손잡이이면서 일부러 데스트로를 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롤렉스 역시 파네라이 못지 않게 왼손잡이 시계에 진심입니다. 왼손잡이였던 찰리 채플린을 위해 크라운이 왼쪽이 위치한 1940년대의 오이스터는 2013년 앤티쿼룸(Antiquorum) 경매에서 5만달러가 조금 넘는 가격으로 낙찰된 적이 있습니다.
Rolex Oyster Ref. 4453 ⓒ antiquorum
1960년대에 제작된 데이데이트, 씨드웰러 Ref. 16600도 왼손잡이를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롤렉스는 한동안 왼손잡이용을 만들지 않다가 GMT 마스터-II Ref. 126720VTNR (2022년) 일명 ‘스프라이트’로 오래간만에 왼손잡이용 시계를 등장시켰습니다.
ROLEX GMT Master2 126720VTNR ⓒ ablogtowatch
블랙&그린 베젤의 이 시계는 이전의 왼손잡이용과 달리 날짜창의 위치를 3시 방향에서 9시 방향으로 옮겨 더욱 왼손잡이용에 적합한 구조를 택했습니다. 다이얼을 그대로 두고 케이스와 무브먼트를 180도 회전시키는 단순한 접근이 아닌, 좀 더 레프티 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셈이죠. 회전 베젤의 색상 조합으로 많은 파생형을 만든 GMT 마스터-II에서 가장 독특한 시계로 등극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됩니다. 덕분에(?) 오른손잡이가 GMT 마스터-II Ref. 126720VTNR를 늘 차던 대로 차더라도 위화감이 없습니다. 거꾸로 찼더라도 날짜를 확대하는 사이클롭스 렌즈가 오른손잡이용처럼 3시 방향에 가 있기 때문에 실수를 인지하기 전까지 알아채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GMT-Master 2 126720VTNR
40mm, 블랙, 오이스터
GMT-Master 2 126720VTNR
40mm, 블랙, 쥬빌리
파네라이의 데스트로, 롤렉스의 왼손잡이용 Ref. 16600 등. 다이버 워치에서 왼손잡이용이 많은 이유는 과거 툴 워치로 사용하면서 오른손에 시계를 찬 왼손잡이들이 조작에 불편함을 호소했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프로 다이버를 위한 오메가 플로프로프(Ploprof)도 비슷한 이유로 크라운을 케이스 왼쪽에 배치한 것처럼 보입니다.
1970년 플로프로프, 2016년 플로프로프 ⓒ omegawatches
하지만 베젤의 시계방향 회전을 방지하기 위해(다이버의 수중 안전을 위해) 케이스 오른쪽의 빨간색(현행은 오렌지나 블루) 버튼을 누르며 회전 베젤을 돌리도록 한 구조를 택했습니다. 본의 아니게(?) 왼손잡이용 디자인이 된 플로프로프인데요. 크라운 가드가 상당히 튀어 나와있어서 오른쪽에 있었다면 사용하면서 불편함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파텍 필립에서 스테인리스 스틸 드레스 워치 이상으로 레어한 시계가 왼손잡이용입니다. 아예 왼손잡이용 시계를 만들지 않는 시계회사도 있긴 하지만, 파텍 필립은 극히 드물게 왼손잡이용을 만들곤 합니다.
Patek Philippe 5373P ⓒ monochrome-watches
최근의 예는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Ref. 5373입니다. 퍼페츄얼 캘린더, 스플릿 세컨즈 크로노그래프를 모노푸셔로 구현한 시계입니다. 오른손잡이용 버전인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Ref. 5372와 비교하면 시계 전체를 180도 돌린 버전입니다. 당연히 다이얼의 회사명과 인덱스는 정방향으로 재배치했고요. 푸시 버튼의 위치가 바뀌면서 조금 헷갈리긴 하지만 나름의 매력이 있습니다. 희소한 기능의 시계가 왼손잡이용으로 나와 희소성이 더욱 강해진 컬렉터블 피스가 아닐까 합니다.
Serena Williams wearing a gold Audemars Piguet Royal Oak at the 2016 French Open ⓒ AFP PHOTO
위의 예 말고도 여자 테니스 선수 세레나 윌리엄스를 위해 소량으로 제작했던 왼손잡이용 로열 오크 오프쇼어도 있습니다. 경기중에 착용하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었는데요. 왼손잡이용이지만 왼손에 착용한 점이 이색적입니다. 크라운이 손목을 누르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왼손에 착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브먼트와 크로노그래프 모듈을 겹쳐 완성한 칼리버 11의 초창기에는 크라운은 케이스 왼쪽, 푸시 버튼은 오른쪽에 배치되었는데요.
The TAG Heuer Monaco Calibre 11 ⓒ ethoswatches
태그호이어의 모나코 칼리버 11 같은 모델도 왼손잡이용으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크라운과 달리 푸시 버튼은 오른쪽에 있어서 완전하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Felix
Writer
시계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