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티지는 흔히 쓰는 말입니다. 빈티지 샵, 빈티지 룩이나 패션 등.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없지만 오래된 물건을 지칭한다는 사실은 다름없습니다. 사실 빈티지의 어원은 와인에서 유래합니다.
특정한 해에 수확한 포도나 와인을 1980년 빈티지, 1999년 빈티지로 부르는 것처럼 와인에서 태어난 말입니다. 갑자기 와인이 등장하니 빈티지의 뜻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은데요. 이번 편에서는 시계에서 빈티지를 어떻게 정의하면 좋을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계도 다른 물건들과 마찬가지로 빈티지에는 오래되었다는 뜻이 깔려 있습니다. 하지만 얼마나 오래된 시계를 빈티지라고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역시나 기준이 없습니다. 극단적으로는 단종되어 더 이상 생산하지 않는 시계를 빈티지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은 보통 데드 스탁(Dead Stock)으로 부르는 편이 합리적입니다.
보통 의류 쪽에서 쓰는 용어로 단종 이후 팔리지 않고 창고에 남아있는 재고를 말하며 시계에도 통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데드 스탁이 계속 팔리지 않고 남아 있다가 무엇인가의 이유로 계속 보관된 채로 혹은 판매되었지만 사용하지 않고 그대로 둔 상태로 계속 유지되었다면 뉴 올드 스탁(New Old Stock, NOS)이라고 합니다. 시계 애호가나 수집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계의 상태가 아닐까 하는데요. 세월을 맞았지만 신품 상태 그대로의 시계입니다. 물론 패키지나 페이퍼 류는 시간이 흘러서 새것 같지는 않겠지만 말이죠. 시계도 사용하지 않은 채로 꽤 오래 지났을 테니 무브먼트 자체에는 문제가 없겠지만 오버홀을 해야 할 겁니다. 뉴 올드 스탁 역시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부를 수 있다는 기준은 없지만, 단종 이후 적어도 10년은 흘러야 뉴 ‘올드’ 스탁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요?
어찌되었든 빈티지 시계가 오래된 시계라는 점에는 모두가 공감할 것 입니다. 얼마나 오래된 시계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합의점이 없죠. 그런데 빈티지 시계에 대한 내용을 찾다 보면 함께 딸려오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앤틱입니다. 이 역시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점은 빈티지 보다 더 오래된 시계를 앤틱이라고 부른 다는 사실입니다. 앤틱은 빈티지에 대한 정의가 세워질 때까지 일단은 뒤로 미뤄 두도록 합시다.
롤렉스는 하나의 모델이 세대를 거듭하고 있기 때문에 빈티지의 정의를 찾는데 도움이 됩니다. 가장 익숙하고 잘 알려진 서브마리너를 예로 들어 볼까 합니다. 현행품인 Ref. 126610LN은 컬렉션을 잘 지키고 있으니 이번에는 딱히 언급할 부분은 없지만, 현재라는 기준점으로 사용해 보겠습니다.
바로 전세대인 Ref. 116610LN과 126610LN은 지름 1mm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외관상으로는 아주 큰 차이가 없죠. 가장 큰 변경점은 탑재한 무브먼트로 자동차로 치면 엔진이 바뀐 셈이니까 한 세대가 바뀌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럼 Ref. 116610LN은 사용하고 유지보수 하는데 문제가 있을까요? 엔진이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공식, 사설 수리점에서 수리와 오버홀이 가능하고, 외관의 부품에 손상이 있다면 교체도 어렵지 않습니다. 일상 사용에 어떤 문제가 없고, 단종된 시기도 그리 오래 되지 않아서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충분히 현역이라는 느낌이죠.
한 세대 전의 Ref. 16610LN이라면 어떨까요. Ref. 116610LN과 비교하면 무브먼트는 동일한 Cal. 3135를 탑재하지만 케이스 형태, 다이얼과 인덱스 무엇보다도 알루미늄 베젤 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롤렉스가 워낙 많은 양의 시계를 만들고 유통하고 있기 때문에 1987년부터 생산해 2010년 무렵 단종된 Ref. 16610LN은 실사용이 가능한 현역입니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이나 1990년대의 년 식이라면 상태가 아무리 좋더라도 세월의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역으로 활약할 수 있는 컨디션의 시계를 빈티지라고 보기에도 좀 애매한 면이 있죠. 그래서 가져온 개념이 영 타이머입니다. 시계에 앞서 빈티지라는 용어를 사용한 자동차에서 통용되는 용어로 생산된 지 대략 20~30년 정도되고 잘 관리한 차량을 뜻합니다. 1990년대나 2000년대 초반에 만든 자동차의 느낌을 떠올려보면 쉽게 와닿을 것 같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Ref. 16610LN은 영 타이머라고 부르면 딱 좋겠습니다.
빈티지는 단종으로부터 최소 30년 이상, 예를 들었던 서브마리너를 기준으로 본다면 Ref. 16610LN 바로 이전에 짧은 기간 생산했던 Ref. 168000이나 그 이전의 Ref. 16800 같은 모델을 빈티지의 시작점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탑재한 무브먼트 Cal. 3035는 Cal.3135로 이어지며 설계에서 중요한 뼈대를 제공했고, 이제는 명 무브먼트의 하나로 꼽고 있습니다. 하지만 Cal.3035를 수리하거나 유지보수 하려면 영 타이머나 현행품에 비하면 조금 불편한 점이 있습니다. 롤렉스의 경우 공식 CS에서 빈티지라도 부품 수급이나 수리가 용이한 편이긴 하지만, 다른 브랜드라면 수리에 시간에 오래 소요 되거나 부품 수급이 수월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기계도 수명이 있는 것처럼 기계인 무브먼트도 수명이 있어서 잘 관리해 왔다고 하더라도 최초 구매했을 때만큼 정확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좀 더 오래되어 반세기가량의 시간을 경험한 시계라면 정확성은 더욱 기대하기 어렵고, 아주 운이 없다면 시계회사가 문을 닫아서 공식 부품을 사용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대체할 부품을 제작해 끼워 넣어야 할지도 모르고요. 그렇게 된다면 시간을 알려주는 본연의 기능은 부수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보다 시계와 함께 향유했던 경험, 혹은 시계를 누군가에게 물려 받았다면 물려준 사람을 기억하는 매개체로서 가치가 더 높을 수도 있겠죠.
빈티지는 단종으로부터 30년 이상, 정확성이나 유지보수에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다고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컨디션에 따라 실사용에 적합하지 않을 가능성도 염두해야 합니다. 빈티지의 요건인 오래된 물건이라는 뜻에는 단순히 시간이 오래 흘렀다는 것 만은 아닙니다. 그 빈티지가 만들어진 시대의 특징이나 의미가 담겨있다는 의미입니다. 때문에 현재와는 거리를 두고 빈티지의 시대를 느끼고 즐긴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을 터이고, 빈티지 시계 또한 그러한 관점에서 가치를 두어야 하지 않을까요?
Felix
Writer
시계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