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세상을 떠난 전설의 시계 디자이너 제랄드 젠타(Gerald Genta)가 남긴 작품은 굵직한 것만 꼽아도 적지 않습니다. 트릴로지(Trilogy)로 부르는 3부작인 오데마 피게 로열 오크, 파텍 필립 노틸러스, IWC 인제니어에 불가리의 불가리불가리나 오메가의 컨스텔레이션도 그의 작품이죠. 그가 세상을 떠날 무렵 하이엔드 스포츠 워치는 하입(Hype)의 단계는 아니었는데요. 요즘의 로열 오크나 노틸러스를 보면서 제랄드 젠타는 어떤 생각을 할지 부쩍 궁금해 집니다.
노틸러스는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가장 비싼 시계라는 문구로 광고를 했습니다. 로열 오크도 그렇지만 1970년대의 스테인리스 스틸은 지금처럼 값싸게 구입할 수 있는 금속이 아니었다는 말도 있는데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금이나 플래티넘 같은 귀금속에 비하면 가격이 싼 것은 사실이었을 겁니다. 아무튼 노틸러스는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가장 비싼 시계임을 자처했고, 이것은 단지 소재의 가격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제랄드 젠타 디자인의 몇 가지 특징에서 기인합니다.
로열 오크의 팔각형에서 인제니어로 이어지며 원으로 바뀌어 가는 기하학적 요소의 변형과 함께 극히 얇은 시계를 추구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스포츠 워치에 어울리는 방수성능을 추구한 점으로 로열 오크의 50m 방수에서 노틸러스는 그 2배가 넘는 120m 방수로 크게 업그레이드 됩니다. 즉 얇은 두께와 방수성능을 동시에 갖추게 되면서 케이스 디자인과 방수기법을 고려한 설계와 제작 수준에 어울리는 가격을 받아야 했던 것이죠.
팔각형에서 원으로 가는 과정에 있던 노틸러스는 팔각형의 모서리가 둥글어지면서 베젤 모양에 반영됩니다. 덕분에 매우 독특한 디자인으로 자리잡게 되는데요. 이것과 함께 케이스 좌우의 귀 같은 디테일도 독특함에 한몫 합니다.
사실 이 귀는 디자인 요소이기도 하지만, 힌지 역할을 하는 부분으로 마치 책을 여닫는 것처럼 케이스를 열고 닫게 해줍니다. 케이스와 케이스백이 한 몸을 이루고 글라스와 베젤이 마치 뚜껑처럼 닫히는 2피스 케이스 구조를 택했죠. 별도의 케이스백을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물이 침입하는 부위를 최소화 하기 위한 아이디어였습니다. 케이스가 여러 피스로 나뉘거나, 가동하는 부분이 많을수록 물의 침입로가 많아지기 때문이죠. 이후 방수성능이 향상되면서 칼리버가 보이는 시스루 백을 사용하면서 3피스 구조로 바뀌지만 최초에는 구조를 단순하게 디자인해 특유의 프로포션을 완성했습니다. 다이얼은 오묘한 블루 컬러에 요트의 데크(Deck) 같은 패턴을 넣어 시원하고 해양 스포츠를 연상시키는 디테일을 택했습니다.
탑재한 칼리버는 명기라고 알려진 셀프와인딩 Cal. 28-255C를 탑재했습니다. 예거 르쿨트르가 개발해 오데마 피게와 바쉐론 콘스틴틴 그리고 파텍 필립만 사용했던 칼리버입니다. 그 중 파텍 필립은 가장 크게 수정해 사용했는데요. 예거 르쿨트르의 베이스 버전인 Cal. 920의 두께에 비해 0.1mm나 늘어났을 정도로 파텍 필립의 의도가 녹아 들어 있습니다. Cal. 28-255C와 케이스 구조 덕분에 Ref. 3700/1A의 두께는 7.5mm에 불과해 제랄드 젠타의 디자인 바람대로 우아함이 살아있었습니다. 디자인, 기술 모든 면에서 총력을 다한 모델이었지만 로열 오크와 달리 초반에는 상당히 고전했습니다. 젊은 층을 노린 시계였지만 실제로는 나이 지긋한 연령층에서 구매했고, Ref. 3700의 판매량은 약 1200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당시로는 큰 케이스 지름으로 ‘점보(Jumbo)’라고 부르던 Ref. 3700보다 1mm 커진 Ref. 5711/1A이 2006년 등장합니다. 지금이 조금 커지긴 했지만 케이스 디자인과 프로포션을 이어받아 전체적인 형상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물론 디테일에서는 세밀하게 변화가 따랐습니다.
케이스 좌우의 귀가 좀 더 부풀었고, 인덱스와 핸즈는 약간 크게 변했습니다. 브레이슬렛의 링크도 조금 짧아지면서 원래에도 유연했던 브레이슬렛이 더욱 유연한 곡선을 그리면서, 착용감의 향상으로 이어집니다. 케이스 마무리에도 향상이 따랐다고 보여지는데, 30여명의 케이스 폴리셔 중 6명이 노틸러스를 전담해서 아름다운 마무리를 진행했습니다. 가장 큰 변화점은 탑재한 칼리버입니다. 인하우스에서 생산한 셀프와인딩 Cal. 315 SC (이후 Cal. 324 SC 로 변경)를 탑재하면서 온전히 인하우스 제품이 됩니다. 전작의 Cal. 28-255C도 인하우스에서 크게 손을 봤지만 예거 르쿨트르의 베이스를 사용한 것이었으니까요.
Ref. 5711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스포츠 워치 수요가 커지고 하이엔드에서도 스포츠 워치가 요구됩니다. 노틸러스의 파생형이 늘어난 때도 이 무렵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섬세한 마이크로 로터 셀프와인딩과 문페이즈를 사용한 대표적인 파생모델 Ref. 5712를 시작으로 셀프와인딩 크로노그래프, 트래블 타임(듀얼 타임)과 크로노그래프, 애뉴얼 캘린더 등 파텍 필립의 개성적인 기능을 노틸러스로 이식해 캐주얼 한 차림으로 가볍게 즐길 수 있게 됩니다. 하이엔드 스포츠 워치의 수요가 커지고, 코로나 펜데믹을 거치며 하입에 돌입하면서 노틸러스의 몸값은 점점 높아지더니 이제는 좀처럼 구경하기도 어려운 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Nautilus 5711/1A-010
40mm, 블루
Nautilus 5711/1A-011
40mm, 화이트
Nautilus Moon Phases 5712/1A-001
40mm, 블루
Nautilus Moonphases 5712GR-001
40mm, 슬레이트 그레이
아이러니하게도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가장 비싼 시계가 Ref. 5711로 막을 내리고 새로운 세대인 Ref. 5811(2022년) 부터는 화이트 골드 케이스로 등장하게 됩니다.
파텍 필립은 귀금속의 사용으로 노틸러스와 브랜드의 가치를 보존하고자 했습니다. 물론 스테인리스 스틸 대신 화이트 골드 케이스를 택하면서 파텍 필립의 수익도 덩달아 올라갈 것입니다. 노틸러스처럼 아이콘이 된 시계들이 으레 그렇지만 오리지날과 비교해서 큰 변화는 없습니다. 굳이 찾는다면 다이얼 컬러의 미묘한 변화 같은 부분이지만, 같은 세대에서도 제작 로트(Lot)에 따라서도 다른 것을 안다면 크게 달라졌다고 하기 힘듭니다.
뚜렷한 변화는 케이스 소재와 함께 탑재한 무브먼트가 Cal.26-330 SC로 바뀐 부분입니다. 실리콘 소재의 사용으로 항자성능의 향상이 있지만 노틸러스 뿐 아니라 파텍 필립 시계 전반의 성능 향상에 해당됩니다. 약 45시간의 전통적인(?) 파워리저브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최신의 라이프 스타일에 잘 적응한 오데마 피게의 신형 셀프와인딩 칼리버에 비하면 분명 아쉬운 점이지만, 여전히 높은 대기수요가 있고 대기열에 있는 그들은 소소한 문제점으로 여기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Nautilus 5811/1G
41mm, 블루
Felix
Writer
시계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