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100m 단거리 달리기에서 마의 벽이라고 여기던 10초가 짐 하인스(James ‘Jim’ Ray Hines)에 의해 허물어졌습니다. 인간의 한계라고 여겼던 숫자를 무너뜨린 것이죠. 시계에서도 한계의 도전은 계속됩니다.
가장 많은 수의 기능을 가진 그랜드 컴플리케이션이라거나, 가장 깊은 물속에 들어갈 수 있는 다이버 워치 같은 주제는 늘 흥미롭고 도전의 대상이 됩니다. 가장 얇은 시계가 되기 위한 도전 또한 빠질 수 없죠. 이번 주제는 가장 얇은 시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가장 얇은 시계 혹은 가장 얇은 무브먼트를 지칭하는 울트라 슬림은 울트라 씬(Thin), 엑스트라 씬, 엑스트라 플랫(Plat) 등으로 부르지만 다 같은 의미입니다. 한계를 넘어선다는 관점에서 다른 주제들은 대부분 더하기입니다. 가장 많은 기능, 가장 깊은 수심(시계의 두께는 물리적으로 두꺼워집니다), 가장 긴 파워리저브, 가장 비싼 시계 등등. 더할 수록 새로운 기록이 세워지고 새로운 한계를 설정하지만, 울트라 슬림이나 가장 가벼운 시계 같은 주제는 그와 반대로 빼기입니다.
가장 가벼운 시계는 신소재의 개발이나 소재의 변주라는 측면에서 흥미로운 요소가 많지만, 울트라 슬림은 그야말로 순수한 빼기입니다. 기능이 적을수록 시계가 얇아지고, 그러다 기능을 전부 덜어낸 시, 분, 초침의 타임온리(Time Only)에서 조차도 두께를 줄이기 위해 초침을 떼어 버리는 게 예사인 세계입니다. 로터가 달린 셀프와인딩은 로터 때문에 두께가 두꺼워지기 때문에 울트라 슬림을 만든다고 하면, 타임 온리에 매뉴얼 와인딩 구성이 필연적이었습니다.
시침과 분침만 달린 매우 심플하면서도 정적인 다이얼. 편의성 때문에 점점 점유율을 잃어가는 매뉴얼 와인딩. 둘의 조합은 자기주장이 약해 인기를 끌기가 쉽지 않죠. 게다가 울트라 슬림은 100이면 100이 드레스 워치였기 때문에 더욱 인기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제조가 쉬운가 하면 그 반대였습니다. 같은 기능이라도 얇게 만들어야 해서 내구성이 상대적으로 약했고, 얇은 두께 때문에 부품 간의 여유가 없어서 조립이 용이하지 않았습니다.
제조비용, 조립 숙련도가 더욱 요구되지만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는 얇은 드레스 워치가 결국 울트라 슬림이었죠. 이런 울트라 슬림이기 때문에 더 비싼 돈을 내고 구입해야 했는데, 장르에 대한 이해가 높지 않으면 지갑을 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파텍필립, 오데마 피게, 바쉐론 콘스탄틴, 피아제, 예거 르쿨트르 등 하이엔드 시계회사의 조용한 대결의 장이었던 울트라 슬림이 점점 쇠퇴기로에 서게 된 딜레마가 그것이었죠.
쇠퇴기로의 울트라 슬림에 다시 불을 붙인 것은 다름아닌 불가리였습니다. 울트라 슬림의 전통강자가 아니었던 그들은 과감하게 게임의 룰을 바꿉니다. 타임온리 + 매뉴얼 와인딩의 조합에서 탈피해 크로노그래프, 투르비용, 미닛 리피터 등 다양한 기능에서 가장 얇은 시계를 연달아 발표하며 기록을 새로 갈아치웁니다. 기록갱신은 흥행으로 이어졌고 불가리는 판을 크게 벌릴 수 있게 됩니다. 그 주역은 옥토 피니씨모였습니다.
제랄드 젠타의 DNA를 이어받은 팔각형 모티프와 면과 각을 강조한 디자인이 특징으로 얇은 두께를 표현하기에 적절한 형태였습니다. 덕분에 울트라 슬림은 다시 주목받는 장르가 되었고 전통의 강자들과 리차드 밀 같은 새로운 도전자들을 불러 모으며 기술력과 아이디어를 다투는 뜨거운 각축장이 됩니다.
불가리는 타임온리 + 매뉴얼 와인딩의 공식을 깨고 울트라 슬림을 여러 기능별로 구현했지만, 결국 가장 얇은 시계의 자리는 원점인 타임온리 + 매뉴얼 와인딩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불가리도 정점에 오르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대상이었죠.
불가리가 울트라 슬림 중의 울트라 슬림을 위해 내놓은 시계는 옥토 피니씨모 울트라(2022년)였습니다. 불가리로서는 ‘8번째의 세계에서 가장 얇은 시계’ 기록을 세운 주역이었죠.
두께 1.80mm, 20 유로센트 동전의 두께와 다름없는 시계 케이스에는 메커니컬 워치가 구동하도록 모든 구성 부품이 자리를 찾아가 있습니다. 극한의 두께를 실현하기 위해 철저한 마이너스가 시행되었습니다. 모든 부품은 두께를 증가시키지 않도록 겹치지 않고 넓게 펼쳤습니다. 덕분에 시, 분, 초침이 하나의 축에 모여 있지 않고, 서로 이웃하는 레귤레이터(Regulator : 시계공방에서 시계를 완성하고 시간을 맞추기 위해 확인하는 용도로 쓰는 일종의 기준시 같은 시계. 시, 분, 초침을 일부러 나눠서 표시하는 다이얼이 특징입니다) 다이얼을 하고 있습니다.
그 주변에는 주요부품이 최대한 겹침을 피해 펼쳐져 있죠. 케이스백을 무브먼트 플레이트를 겸해서 쓰는 방식도 도입했습니다. 케이스가 얇기 때문에 케이스 강성을 높이기 위해 티타늄과 텅스텐카바이드를 사용하고, 사파이어 크리스털 글라스도 종이짝처럼 얇게 가공해야 했죠. 크라운은 케이스와 수직 연결하는 방식이 보통이지만 두께를 줄이기 위해서 수평으로 연결해, 시간 조정용 하나와 태엽감기용 하나 총 두 개의 크라운을 장착하는 등 시계의 보편적인 틀과 고정관념에서 탈피했습니다.
옥토 피니씨모 울트라는 가장 얇은 시계로 등극해 오래도록 왕좌를 누릴 것 같았지만, 허무하게도 불과 몇 달 지나지 않아 리차드 밀 UP-01 페라리에 자리를 내어줍니다.
두께 1.75mm의 새로운 왕은 여러 면에서 옥토 피니씨모 울트라와 유사한 기법으로 울트라 슬림을 완성해 냈고, 심지어 크라운까지 떼어버리고 별도의 툴로 조작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그 때문에 반칙이라는 이야기도 많았습니다) 기술력과 기술력 이상의 인내심이 요구되는 울트라 슬림 장르이기 때문에 리차드 밀 UP-01 페라리가 가장 얇은 시계로 계속 기억되리라는 예상과 달리, 또 다시 허무(?)하게 그 자리를 내어주었습니다.
옥토 피니씨모 울트라의 강화버전인 옥토 피니씨모 울트라 COSC가 두께 1.70mm로 다시 왕좌를 탈환합니다. 경쟁자 대비 두께 0.05mm, 옥토 피니씨모 울트라 대비 두께를 0.1mm나 줄였습니다. 불과 2년만에 들고 나온 비책은 베젤과 사파이어 크리스털 글라스 등에 걸쳐 이뤄진 재작업 덕분이었습니다.
구조를 손보지 않고 울트라 슬림에서 비교적 주변의 영역인 케이스 부품의 재작업만으로 0.1mm를 줄일 수 있었던 점은 놀랍긴 합니다. 아마 케이스 부품의 한계마진에 가깝게 줄인 것 같습니다. 불가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COSC 인증을 받았습니다. 사실 두께를 줄인 부분보다 이 점이 더 놀랍습니다. 극한의 두께를 가지고 하루 오차 범위 -4~+6초를 달성한 정확성이야 말로 양립이 어려운 두 가지 요소 사이에서 핀포인트와 같은 균형점을 찾아낸 것일 터입니다. 아마도 당분간 울트라 슬림의 정점은 흔들리지 않을 것 같지만,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지금 스위스 어딘가에서 옥토 피니씨모 울트라 COSC보다 머리카락 한, 두 가닥 정도 더 얇은 시계를 만들고 있을지 아무도 모르죠.
Felix
Writer
시계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