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시계를 고도의 기계장치, 더 나아가 예술작품에 빗대기도 한다. 손목시계가 가지고 있는 기술력과 심미성을 부정하진 않겠지만, 그것만으로 그 가치를 설명하기 어렵다.
시계를 예술 작품과 비교하여 가장 큰 차이를 꼽으면 '입을 수 있다'는 점이다. 내 선택을 받은 순간부터 내 몸에 붙어 따라다니는 것이며, 그것이 가진 고유성이 있어 심미성까지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시계를 고른다는 것은 내 손목 위에 ‘어떻게 입을 것이고’, ‘무얼 담고 싶은지’를 결정하는 일이다. 이 특별하지 않은 전제를 가지고 내가 애용하는 시계인 오데마피게 로얄오크 56175TT 모델을 소개하겠다.
시계를 '찬다'는 표현을 쓰지 않고 '입는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이 글의 주인공이 로열 오크이기 때문이다. 로열 오크와 입는다는 표현이 무슨 상관일까?
오늘날의 로열 오크 디자인을 떠올린다면 이 말이 와닿지 않을 것이다. 이를 이해하려면 최초의 로열 오크를 보며 디자이너 제랄드 젠타가 디자인했던 의도에 주목해 봐야 한다. 그럼 왜 오늘날의 애호가들이 그토록 '일체형 시계'에 집착하는지도 자연스레 이해된다.
제랄드 젠타의 두 대표작, 파텍필립 노틸러스와 오데마피게 로열 오크다. 노틸러스는 곡선미, 로열 오크는 직선미를 강조했다는 것을 빼면 둘은 유사한 면에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으며, 같은 철학에 입각해 만들어진 시계다. 내가 생각하는 제랄드 젠타는 시계의 디자인이 '본체(헤드)'에 집중되던 풍조를 깨고 싶어했던 사람이며, 우아한 시계는 '팔찌를 두르듯' 차야 한다는 철학을 가진 사람이다.
최초의 젠타 시계들은 폭이 넓은 브레이슬릿을 가지고 있다. 헤드와 밴드가 구분되지 않고 자연스러운 일체감을 가지도록 브레이슬릿은 시계 본체에 준할 정도의 너비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착용감을 해치지 않도록 끝으로 갈수록 테이퍼드된다. 그리고 면적이 케이스의 몇 배나 넓은 밴드 전체를 본체 다루듯 공을 들여 세공했다. 당시의 모든 경쟁사가 그랬듯 가죽줄로 '퉁'치면 되는데도 말이다. 헤드가 아닌 밴드를 중요한 디자인 요소로 주목한 것이다.
거기에 '브레이슬릿처럼 얇은' 8mm도 되지 않는 얇은 두께를 가지고 있으니 헤드가 볼록하게 튀어나온 보통의 시계와는 확실히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 옷에 비유하자면 가벼운 캐시미어 니트 한 장을 걸쳤을 때의 경량감이다. 로얄오크도 살에 달라붙으니 '입는다'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을까?
내가 56175 모델을 선택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제랄드 젠타가 직접 디자인한 모델은 아니지만 그의 생각을 가장 잘 계승한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까지 로열 오크는 시대 흐름에 따라 작지 않은 변화를 했고 일체감보단 존재감을 선택하며 밴드와 구분될 정도로 본체가 두꺼워지고 있다. 나는 앞서 보여준 최초의 로열 오크 모델이 가진 직경 39mm, 두께 8mm의 완벽한 비례감을 동경하기 때문에 다른 답을 찾아야 했다.
56175는 33mm로 사이즈가 작아졌지만, 쿼츠 무브먼트를 사용해 두께가 5mm밖에 되지 않는다. 때문에 제법, 아니 어쩌면 5402보다 더 웨어러블하다는 생각도 든다. 33mm라는 사이즈가 너무 작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로열 오크가 가지는 디자인적 특성 덕에 실제로는 36mm 원형 시계와 비슷한 크기여서 무리 없이 착용할 수 있다.
물론 처음부터 이렇게 마음에 드는 시계를 찾아낸 건 아니었다. 내 첫 로열 오크는 39mm 사이즈의 15300이란 모델이었는데 환상적인 시계였지만 애정이 가지 않았다. 16.5cm 정도의 손목을 가진 나에게 39mm라는 '숫자'는 마음에 쏙 들었으나, 실제 착용했을 땐 러그에 고정된 링크 때문에 크고 불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반면 56175는 왜소한 손목의 동양인에게 특화된 로열 오크랄까? 쿼츠 무브먼트를 탑재했으니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건 덤이다. 요약하자면 나는 본체와 밴드가 한 몸으로 보일 만큼 얇아서 '팔찌처럼 두를 수 있는' 핏을 원했던 것 같다. 그래서 56175를 입는다.
누구에게나 의미가 남다른 물건이 있을 거다. 하다못해 불량식품을 보고 유년 시절 추억을 떠올리기는 하니까. 손목시계쯤 되면 더 거창한 의미를 담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쓴 돈이 얼만데! 내게 로열 오크는 전화위복을 의미한다.
플렉스의 상징쯤 되는 물건이 웬 전화위복?
이를 설명하려면 시계인들에겐 지겨운 쿼츠 파동 얘기가 안 나올 수 없는데, 럭셔리 스포츠워치의 탄생 배경쯤 되니 읽어줬으면 좋겠다. (짧게 썼습니다^^;)
일본 시계회사가 일으킨 쿼츠 파동은 스위스 시계 산업에 큰 타격을 줬다. 가격은 저렴했으며, 성능 좋고 튼튼했다. 산업 성장엔 문화 격변이 따랐다. 시대는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젊은 부호들은 더 이상 그들의 아버지가 차고 있는 '금으로 만든 기계식 시계'를 차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지금도 가죽줄 달린 금시계는 노티 난다고 피하니 무슨 마음인지 알 것이다) 이로 인해 수많은 스위스의 시계회사가 파산했다.
오데마 피게는 회사의 사활을 걸고 무언가 해야 했다. 모든 자원을 집중해 아이디어만으로도 파격 그 자체였던 로열 오크 개발에 착수했다. 팔각형 베젤에, 커다랗고, 값싼 스틸로 만든, 그런데 매우 비싸게 파는 시계. 고상한 유럽 중년층 시계 애호가 눈에는 ‘저급함' 그 자체였을 수 있다.
하지만 그 괴상하고 차별화된 디자인 덕에 젊은 부호들 마음속에 '그래도 손목시계를 굳이 굳이 차야 할 이유'가 생겼다. 로열 오크의 출시로 오데마피게는 어려운 시기에도 큰 성공을 거뒀고 '럭셔리 스포츠 워치'라는 장르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디자인 하나로 쇠를 깎아 금처럼 팔 수 있는 회사가 된 것이다.
때문에 로얄오크는 '최초로 스틸을 금처럼 귀하게 다룬 시계'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최초로 밴드를 본체처럼 귀하게 다뤘듯' 말이다. 쿼츠 파동이란 위기가 없었다면 저런 '저급한' 시계가 나올 수 있었을까? 진흙 속에서 피어난 꽃 같다. 꿈보다 해몽일까? 웃기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로열 오크의 탄생에서 도전 정신을 배운다.
지금까지의 스토리는 로열 오크가 가진 이야기일 뿐이지 나와는 상관이 없다. 달에 간 스피드 마스터는 멋지지만 내가 밤하늘의 별 한 번 안 쳐다보는 사람이면 무슨 상관일까? 나와 유대를 쌓으려면 내 마음에 드는 특별한 구석이 있어야 한다.
56175TT가 가진 가장 큰 매력은 소재에 있다. 이게 정말 '죽여주는' 부분이다. 대부분 어두운 색의 탄탈럼으로 만들어졌고, 사이사이 스테인리스 스틸을 섞은 투톤컬러 모델이다. 탄탈럼과 스틸은 밝기와 빛 반사에 차이가 있으면서도 같은 회색빛 톤을 가지고 있는데, 그 구분감과 일체감 사이 절묘함이 이 시계의 아름다움이다. 일체감으로 과시적인 시계로 보일 걱정을 덜어주면서, 대비감으로 로열 오크 브레이슬릿이 가진 디테일은 더 드러내 준다. 정확히 내가 줄이고 싶은 것을 줄여주고, 늘리고 싶은 것을 늘려줬다.
56175TT는 스텔스(Stealth)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시계이다. 대부분은 스텔스하면 전투기가 떠오르면서 뭔가 굉장히 멋진 느낌을 받을 테지만, 단순하게 화려하지 않다는 뜻이다. 나는 전부 스틸 소재인 로열 오크를 들였다가 링크 단면의 화려한 빛 반사가 부담스러워 자주 착용하지 못하고 판매했던 아픈 기억이 있다.
반면 56175TT는 탄탈럼으로 만들어져 색감이 어둡고 빛을 아주 조금만 반사하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는다. 로열 오크는 외모가 가진 특징이 뚜렷해 사람들이 알아보기 좋은 시계인데, 그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거다. 덕분에 시계 소재를 선택한 이유를 이렇게까지 유추해
줄 고맙고 섬세한 사람(?)을 어디선가 마주칠 거라는 기대는 안한다. 고작 내 성향을 나에게 천명하는 것 정도겠지만 나는 이 시계를 고르며 내 취향과 생각을 담았다. 그걸 누가 알아준다면 럭키가이고!
나는 '이 시계가 당신을 위한 완벽한 시계예요!'를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저 나라는 사람은 어떻게 시계를 즐기는지 하나의 놀이법을 보여줬을 뿐이다.
요약하자면 결국 원작자의 의도대로 '입기 좋게' 만들어진 이 시계는 전화위복이란 거창한 의미까지 담고 있으며, 내 조건에 딱 들어맞기까지 한다. 그렇게 써놓고 나니 꿈속의 시계일 것만 같지만 나와 조금이라도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에게 이 시계는 대단히 실망스러울 가능성이 높다. 우린 모두 다르고 각자의 것이 있으니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맞다. 나는 별거 아닌 시계를 대단한 것인 양 칭송한 거다. 하지만 나로선 당연한 거 아닌가?언제나 시계를 가치 있게 만드는 건 그 시계의 사용자니까 말이다.
SILLIONS
Wr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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