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에는 무수히 많은 손목시계가 존재합니다. 기계식으로만 한정해도 개별 개체수를 헤아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죠. 그래도 선구자는 있기 마련입니다. 캄캄한 밤의 길잡이별처럼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고 시계 역사를 이끌어온 브랜드와 시계들을 소개합니다.
바쉐론 콘스탄틴은 1755년 설립 이후 지금까지 한번도 생산을 중단하거나 명맥이 끊긴 적이 없는 브랜드입니다. 연도로만 따지면 1735년에 문을 연 블랑팡이 가장 오래되었지만 1970년대 쿼츠 쇼크의 여파로 거의 없어지다시피 했다가 1983년 시계 마케팅의 천재라 불리는 장-클로드 비버가 되살린 것이라 역사가 유지되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브레게도 비슷합니다. 천재 워치메이커가 불리던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가 1755년부터 자신의 이름을 걸고 뛰어난 시계를 만들기 시작해 아들과 손자가 사업을 이어받았다고는 하지만, 쇼메 형제와 다니엘 로스가 브레게 하이엔드 워치에 관심을 가졌던 1970년대 전까지는 존재감이 크지 않았습니다. 1999년에서야 스와치그룹 전 회장 니콜라스 하이에크가 브랜드를 대대적으로 부흥시켰죠.
최초의 손목시계는 여성용이었습니다. 주머니가 없는 드레스의 특성상 허리춤에 매달거나 손목에 착용하는 장신구로 만들었기 때문이죠. 레인 드 네이플의 시초가 된 브레게 2639(1810년)이나 기네스북에 최초의 손목시계로 등재된 파텍 필립 여성시계(1868년)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다만 브레게의 경우는 실물이나 사진이 남아있지 않고, 파텍 필립은 장식성이 지나치게 강하다는 한계를 지녔죠. 남성용 손목시계는 회중시계에 벨트를 감은 형태의 군용 시계로 시작되었습니다. 1880년 독일 황제의 의뢰를 받아 제라드 페리고가 만든 시계가 그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손목시계는 1904년에 탄생한 까르띠에 산토스라 할 수 있습니다. 스트랩을 제대로 장착할 수 있는 러그 일체형 케이스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기계식 시계의 두께를 줄이는 일은 그야말로 극한의 경연입니다. 부품을 최대한 덜어내고 깎아내면서 정상적으로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워치메이킹 기술과 노하우를 총동원해야 할뿐더러, 때로는 기존의 이론까지 뒤집어야 하니까요. 따라서 울트라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브랜드는 소수에 불과하며, 기록 경신도 그 리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현재 가장 얇은 기계식 시계는 2022년 리차드 밀 RM UP-01 시계가 두께 1.75mm로 불가리 옥토 피니씨모 울트라(1.8mm)를 제치고 1위에 올라섰습니다. 더 얇은 두께를 위해 전통적인 크라운 시스템(와인딩 스템)까지 바꿔버렸죠. 손으로 태엽을 감는 핸드와인딩 방식이라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덧붙여, 오토매틱 분야는 자동으로 태엽을 감아주는 로터 때문에 필연적으로 좀더 두꺼워집니다. 2018년 두께 3.95mm로 탄생한 불가리 옥토 피니씨모 투르비용 오토매틱이 여전히 기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얇은 셀프와인딩 시계이자 투르비용 시계죠.
1892년 스위스의 루이 브란트&필스(Louis Brandt & Fils, ‘루이 브란트와 아들들’이라는 뜻)사는 최초의 미니트 리피터 손목시계를 만들어냅니다. 기존의 회중시계 무브먼트를 손목시계용으로 작게 만드는 데 성공해낸 것이죠. 그로부터 2년 뒤 루이 폴과 세자르 브란트 형제는 사명을 오메가로 변경합니다. 스위스를 넘어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릴 메가 매뉴팩처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분야에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롤렉스는 1926년 세계 최초로 100m 방수가 가능한 오이스터 케이스의 특허를 취득했지만 당시 오이스터 시계는 다이버 워치가 아니었습니다. 파네라이가 1936년에 만든 라디오미르는 이탈리아 해군 소속 특수 잠수 부대를 위한 군용 시계였고요. 민간용 다이버 워치로 첫 선을 보이며 다이버에게 인정 받은 시계는 1939년의 오메가 마린입니다.
하지만 이중 케이스를 적용한 사각형 디자인은 지금의 다이버 워치와는 사뭇 다릅니다.
현대 다이버 워치의 전형으로 볼 수 있는 시계는 1953년에 탄생한 블랑팡 피프티 패덤즈입니다. 롤렉스 서브마리너와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지만 서브마리너가 단방향 베젤을 장착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렸기 때문입니다.
1909년, 프랑스 항공기술자 루이 블레리오는 직접 발명한 단엽기 블레리오 11호를 타고 세계 최초로 영국 해협 횡단에 성공했습니다. 미국의 라이트 형제가 인류 역사상 최초의 동력 비행기를 발명한지 6년만의 일이었습니다. 블레리오의 손목에는 제니스의 항공시계가 있었죠.
시인성을 위한 커다란 아라비아 숫자 인덱스와 야광 커시드럴 핸즈, 파일럿 장갑을 착용한 채로 돌릴 수 있는 양파 모양 크라운, 코인 베젤 등 필수 요소를 모두 갖춰 현대 파일럿 워치의 시작점으로 여겨집니다. 게다가 제니스는 유일하게 파일럿 워치의 다이얼에 ‘Pilot’을 표기할 수 있는 브랜드이기도 합니다. 창립자 조르주 파브르-자코가 일찍이 상표권을 등록해둔 덕분입니다.
기성 세대에 저항하는 ‘반문화'가 절정에 달한 1969년은 시계 역사에서도 대격변기였습니다. 마침내 오토매틱 크로노그래프가 탄생한 해이기 때문입니다. 1960년대에 이미 오토매틱 방식으로 전환한 일반 손목시계와 달리 크로노그래프는 여전히 핸드와인딩 방식이라 고루한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이에 제니스, 세이코, 그리고 브라이틀링⋅호이어-레오니다스(현 태그호이어)⋅해밀턴-뷰렌(현 해밀턴)⋅뒤부아 데프라의 4사 연합이 출사표를 던졌고, 모두 같은 해에 오토매틱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다만 그 시기가 조금씩 다릅니다. 일단 1969년 1월에 제니스가 가장 먼저 일체형 오토매틱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 ‘엘 프리메로'를 발표했으나, 출시는 그 해 9월에 이뤄집니다. 4사 연합은 3월에 오토매틱 무브먼트에 크로노그래프 모듈을 올린 ‘크로노매틱'을 공개했죠. 세이코는 5월에 수직 클러치와 칼럼 휠을 갖춘 칼리버 6139를 상용 시계인 스피드타이머로 선보였습니다.
덧붙여, 최초의 핸드와인딩 크로노그래프 손목시계는 론진(1913년)입니다. 브라이틀링은 1915년 크로노그래프 푸시버튼을 크라운에서 분리하고 케이스 4시 방향에 리셋 버튼을 추가해 우리가 알고 있는 크로노그래프 손목시계의 모습을 완성했죠.
내구성, 내식성, 내자성, 심지어 생체 친화성까지 뛰어난데 가볍기까지 한 티타늄은 스포츠 워치가 강세인 요즘 더욱 각광받는 소재입니다. 이런 티타늄에 첫 도전장을 내민 브랜드는 시티즌이었습니다. 1970년대, 기계식과 쿼츠를 혼합한 하이브리드형 손목시계인 X-8 크로노미터를 무려 순도 99.6%의 티타늄으로, 한정 생산이었지만 2000개나 제작했죠. 가공이 까다롭다는 티타늄의 단점과 당시 기술 수준을 떠올려보면 굉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덧붙여, 오데마 피게가 1986년에 선보인 세계 최초의 셀프와인딩 투르비용 손목시계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얇은 셀프와인딩 투르비용 손목시계(두께 4.8mm)였을 뿐 아니라 투르비용 케이지를 티타늄으로 만든 최초의 시계이기도 했습니다.
Tampa
Writer
시계 칼럼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