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텍 필립 노틸러스 Ref. 5711, 오데마 피게 로열 오크 ‘점보’ 엑스트라씬 Ref. 15202, 롤렉스 데이토나 Ref. 116500LN. 세컨핸드마켓에서 프리미엄이 가장 가파르게 상승했고 또 가장 높게 형성되어 ‘빅 3’로 통하는 시계들입니다. 전통적으로 ‘빅 3’는 ‘홀리 트리니티'로 알려진 파텍 필립,
오데마 피게, 바쉐론 콘스탄틴을 가리키던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프리미엄이 시계의 중요한 가치 기준이 된 지금, 전 세계적으로 극심한 품귀를 빚는 롤렉스가 세컨핸드마켓의 ‘빅 3’에 편입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각 모델의 프리미엄 현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파텍 필립 노틸러스 Ref. 5711의 경우, 리테일가는 4000만원(2018년 기준) 정도였지만 리세일가(모두 글로벌 기준)는 럭셔리 스포츠 워치의 광풍이 불어닥친 2021년부터 8000만원에 육박했습니다. 2022년초 파텍 필립 CEO 티에리 스턴이 Ref. 5711의 단종을 발표하자 리세일가는 2억 5000만원이라는 기록적인 상승세를 보이기도 했죠. 2022년 10월에 후속작 Ref. 5811의 화이트 골드 버전이 등장한 후 현재는 1억 6000만원 정도로 다시 단종 발표 전의 안정세(?)를 찾은 모습입니다. 그래도 리테일가에 비하면 거의 3배나 많은, 어마어마한 프리미엄을 자랑합니다.
Nautilus 5711/1A-010
40mm, 블루
Nautilus 5711/1A-011
40mm, 화이트
오데마 피게 로열 오크 ‘점보' 엑스트라씬 Ref. 15202는 워낙 소량 입고되는 시계였습니다. ‘점보'는 1972년 탄생한 첫 번째 로열 오크 Ref. 5402의 지름 39mm 케이스가 그 당시 유례없이 커다란 크기였기 때문에 붙은 별명입니다. 현대 기준에서는 오히려 작은 편에 속하지만, Ref. 5402의 직계후손이자 로열 오크의 근본인 Ref. 15202도 케이스 지름이 39mm라 동일한 별명을 씁니다. 럭셔리 스포츠 워치가 유행하기 전에는 부티크에서 구매하기가 그렇게까지 어려운 시계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로열 오크 셀프 와인딩 Ref. 15400(현재 Ref. 15500)보다 마니악한 모델로 여겨졌죠. 하지만 2021년에 접어들며 리세일가는 훌쩍 뛰어올라 순식간에 1억 원을 넘겼고, 2022년 초에는 2억 원에 도달했습니다. 지금은 1억 원 초반대로 거래되는 추세입니다. Ref. 15202는 작년 로열 오크 탄생 50주년을 맞아 Ref. 16202로 세대교체를 진행했습니다. 여전히 오데마 피게에서 생산량을 세심하게 관리하고 있어 세컨 핸드 마켓의 추이는 더욱 흥미로울 예정입니다.
Royal Oak "Jumbo" Extra-Thin 15202ST.OO.0944ST.03
39mm, 블루
Royal Oak "Jumbo" Extra-Thin 15202ST.OO.1240ST.01
39mm, 블루
한편 롤렉스 데이토나는 컬렉션 최초로 세라믹 베젤을 장착한 Ref. 116500LN(2016년~2022년), 일명 ‘세라토나'가 세컨 핸드 마켓에서 가장 인기 있는 레퍼런스로 통합니다. 블랙 다이얼보다 화이트 다이얼을 좀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고요. 리테일가는 2000만 원이 채 되지 않았지만 리세일가는 단종을 앞두고 3배가 넘게 뛰어오르기도 했습니다. 요새는 4000만 원 후반대로 유지 중입니다.
Daytona 116500LN
40mm, 화이트, 오이스터
Daytona 116500LN
40mm, 블랙, 오이스터
자연히 세 모델의 신품은 시계 애호가 사이에서 ‘성배'나 ‘유니콘'이라 불리며 부르는 게 값인 상태입니다. 이쯤에서 의문이 생깁니다. 귀금속이나 보석 박힌 시계도 아닌, 특정 브랜드의 스테인리스 스틸 스포츠 워치가 왜 이렇게까지 인기가 많은 것일까요?
배럴형 케이스에 브레이슬릿이 통합된 스테인리스 스틸 소재 방수 시계’가 럭셔리 스포츠 워치의 기본 개념입니다. 물론 하이엔드 워치메이커의 작품이라면 그 기대를 충족할 만큼 안팎으로 뛰어난 세공과 마감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오리지널 디자인 역시 중요한 요소입니다.
럭셔리 스포츠 워치 분야에서 최고 인기를 구가하는 파텍 필립 노틸러스와 오데마 피게 로열 오크는 모두 같은 사람이 디자인했습니다. 바로 럭셔리 스포츠 워치의 아버지라 일컫는 스위스 시계 디자이너 ‘제랄드 젠타'입니다. 1970년대 스포츠 워치의 새로운 판도를 개척한 럭셔리 스포츠 워치는 2018년 즈음 무서운 속도로 부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스틸 스포츠 워치라는 특징이 SNS의 유행과 함께 럭셔리 캐주얼 라이프스타일을 지향하는 시대상과 맞물렸을 뿐 아니라, 기존의 보수적인 이미지에서 탈피해 소비자에게 하이엔드 워치의 허들을 다소 낮춰주는 역할까지 했죠. 최근에는 미들레인지 브랜드에서도 ‘젠타풍' 스포츠 워치를 대거 선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오리지널 디자인이 더욱 각광받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프리미엄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세컨핸드마켓의 ‘빅 3’ 중 파텍 필립 노틸러스와 오데마 피게 로열 오크 ‘점보' 엑스트라씬 모두 럭셔리 스포츠 워치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모델입니다.
롤렉스 데이토나는 제랄드 젠타의 디자인도 아니고 케이스와 브레이슬릿 통합형도 아닙니다. 심지어 롤렉스는 탄생부터 지금까지 실용적인 시계만을 추구했습니다.. 그 철학이 롤렉스를 유일무이한 지금의 위치에 올렸습니다. 고가의 컴플리케이션이나 한정판 전략 없이도 롤렉스가 항상 특별 대접을 받는 이유입니다. 데이토나는 1963년부터 롤렉스의 유일한 크로노그래프 시계이자 스포츠 크로노그래프의 아이콘으로서 꾸준히 시계 애호가의 러브콜을 받아왔습니다. Ref. 116500LN도 럭셔리 스포츠 워치 바람이 불기 전부터 구하기가 쉽지 않은 시계였죠. 출시 전부터 구매 대기가 만만치 않았는데, 럭셔리 스포츠 워치의 인기까지 더해져 몸값이 폭발적으로 뛰어올랐습니다. 그 결과, 럭셔리 스포츠 워치의 정수로 꼽히는 두 모델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습니다.
이쯤 되면 ‘빅 3’의 프리미엄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궁금해집니다. 그래프의 수치는 2022년 최고점을 찍은 후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락장의 시작일까요 아니면 단기적인 조정장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우선 팬데믹의 종결과 관련이 있습니다. 럭셔리 스포츠 워치가 급부상하며 ‘빅 3’ 시계에 기하급수적 프리미엄이 붙기 시작한 시기는 전 세계를 덮친 코비드-19의 팬데믹 기간과 일치합니다. 경기 부양의 일환으로 유동성이 급증했고, 자산 가치가 증대하며 자연스럽게 소비가 증가했기 때문이죠. 특히 럭셔리 시장이 그 수혜를 입었습니다. 팬데믹이 해제되며 그 반대 상황이 벌어지자 소비심리 역시 줄어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지금이 오히려 ‘성배'를 찾아 나서기에 적절한 때 일 수 있습니다. ‘빅 3’의 가치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을 전망이기 때문입니다.
이들 시계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희소성입니다. 세 모델 모두 이유를 막론하고 구하기 힘들어진 시점부터 리셀가가 치솟았습니다. 지금은 공교롭게도 전부 후속 모델로 교체되며 생산이 종료되었죠. 인기 있는 와인의 ‘올빈(old vintage)'처럼 필연적으로 수요가 공급을 초과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공신력 있는 세컨 핸드 마켓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이버는 롤렉스, 오데마 피게에 이어 지난 5월 31일 자로 파텍 필립을 신규 거래 가능 브랜드 중 하나로 추가했습니다. 기회는 준비된 사람, 아니 ‘잠복’한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Tampa
Writer
시계 칼럼리스트